부군의 함자는 원록이며, 자는 계수,호는 회당인데 다시 호를 도암이라 하였다. 널리 공부하고 힘써 행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순수하고 지극하였다. 신재 주세붕 선생에게 공부하였고 또 남명 조식,월천 조목 및 여러 뛰어난 유학자나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학술을 연마하고 강구하여 순정한 명성이 자못 파다하게 알려졌다. 어버이를 위하여 과업을 공부하여 여러 차례 거론되었으나 입격하지는 못하였고 부득이 훈도, 학관 자리를 구하여 어버이를 봉양하는 뜻을 이루었다.
妣星山李氏智源之女 耕隱先生之曾孫也
비성산이씨지원지녀 경은선생지증손야
부인은 성산 이씨 지원의 따님이신데 경은선생(이맹전李孟專, 1392~1480)의 증손이다.
이는 우리 어머니 박씨의 영정이다. 어머니는 성화 19년 계묘년(1483)에 태어나셔서 금년 93세시다. 지금까지 살아계시니 인간 세상에서 드문 일이다. 머리는 아이처럼 터럭이 없게 되었고 등은 굽으셨으며 허리 아래가 편하지 못하시나 모습이나 말씀하시는 기운은오히려 강건하시다. 아들[원록]은 60살이 될 때까지 서로 의지가 되고 목숨을 서로 의지하는 지경이라한편으로 기쁘면서 한편으로 근심하는 마음을 스스로 이길 수 없다. 이에 아들[흘]을 시켜서 촛불 아래에서 본떠 그리도록 하고 색채를 넣어서 영정으로만들었다. 훗날 오랜 시간이 흐른 뒤라도 머리 속에 삼삼하도록 하고 마음 속에 담아두게 하여 슬하에서의즐거움을 따르는 것과 같으며 나의 공경하고 사모하는 것과 같았다. 이빨이 다 빠지도록 늙어도 그치지않으리라. 만력 3년 을해(1575)월 일 아들 원록이 삼가 쓰다.
군의 성은 신, 이름은 원록, 자는계수이며 스스로 회당이라 하였다. 본관은 거제도의 아주이다. 이분은고려 때 전라도 안렴사를 지낸 우의 6세손이다. 안렴공은혼탁한 세상에 처하여 청렴결백함으로써 절개를 지키려 하였다. 부친 판도판서 윤유의 상을 당하자 삼년간여묘살이를 하였는데 한결같이 예의와 제도를 지켰다. 대나무 두 그루가 묘의 옆에서 자라났으니 당시 사람들이효성에 감응하여 그리된 것이라 여겼으며 조정에 알려져 정려받았다. (이 사실은) 나라의 기록 및 여지지에 실려 있다.
예전에 우리 선군께서 이른 나이에 풍질에 걸리셨다. 병술년에 찬 기운이들어 의약이 효과가 없었고 또 해소가 생겨 기침과 천식이 심하여 주야로 크게 고통을 겪으셨다. 군은나이가 겨우 10여 세였는데 팔공산에 올라 직접 약재를 채취하였으며 좋은 의사의 말대로 조제하여 밤낮으로달여서 올렸다. 눈조차 붙이지 않았고 옷의 띠조차 풀지 않은 채 8년을그리하였다.
癸巳仲春 君年十八 遂遭終天之痛 籲天叩地 五內崩摧 入則慰母 出則血泣
계사중춘 군년십팔 수조종천지통 유천고지 오내붕최 입칙위모 출칙혈읍
계사년 중춘에 군의 나이 18세였는데 지극히 애통한 친상을 당하였다.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고 땅을 두드리며 애통해 하였는데 오장이 찢어질 듯하였다.(그럼에도) 집에 들어가서는 어머니를 위로하였고 나오면 피눈물을 흘렸다.
至十一月己酉 葬于八智山 乾向之原 廬墓三年 構齋舍以爲永世奉先之所
지십일월기유 장우팔지산 건향지원 여묘삼년 구재사이위영세봉선지소
11월 기유일이 되어 팔지산 건향 언덕에 장례지내고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 하기를 3년동안하였다. 재사를 지어 영원히 선조들을 모실 수 있는 곳으로 삼았다.
乙未春服闋 君年始二十 事親事兄無不極其誠
을미춘복결 군년시이십 사친사형무부극기성
을미년 봄에 복상이 끝났을 때 군의 나이 스물이었다. 어머니를 모시고형을 섬기는데 그 정성을 이루 다 하지 않음이 없었다.
戊戌承老母旨 遊于國學 閱歲而還 自是硏精篤志 講習不怠
무술승노모지 유우국학 열세이환 자시연정독지 강습부태
무술년에 늙으신 어머니의 뜻에 따라 국학(성균관)에 가서 공부하였으나 해 넘기지 않고 돌아왔다. 이 때부터 정진하여연구하고 뜻을 돈독히 하며 공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己亥秋與我同屈於漢城之發解還途 余構瘧疾 未克前路 間關跋涉
기해추여아동굴어한성지발해환도 여구학질 미극전로 간관발섭
기해년 가을에 나와 함께 한성부의 시험에서 선발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갑자기 학질에 걸려 더 이상 나아가지못하고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었다.
至天民川時 秋水方漲 人言此水有毒螫之蛇 多害人致死 君不以爲惑 背負病兄 乃克濟水
지천민천시 추수방창 인언차수유독석지사 다해인치사 군부이위혹 배부병형 내극제수
천민천에 이르렀을 때 가을 물이 바야흐로 넘쳐흘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물에는 독을 가진 이무기가 있어 사람들을 많이 해쳐 죽이기도 했다.”고하였다. 그러나 군은 의심하지 않고 병든 형(필자)을 업고서 물을 건넜다.
庚子春 君娶星山李氏 花山公之後 正言諱孟專之曾孫女也 余喜得佳配 以悅親心
경자춘 군취성산이씨 화산공지후 정언휘맹전지증손녀야 여희득가배 이열친심
경자년 봄에 군은 성산 이씨와 혼인하였는데 화산공 후손이며 정언 이맹전의 증손녀시다. 나는 그가 좋은 배우자를 얻어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음을 기뻐하였다.
辛丑壬寅兩歲 飢饉連仍 君以奉養不稱爲憂 卒其細 君親臭菽水
신축임인양세 기근연잉 군이봉양부칭위우 졸기세 군친취숙수
신축 임인년 두해 동안 기근이 잇달았다. 군은 봉양을 제대로 하지 못함을걱정하였으며 끝내 그 세세하게 하였으니 군은 직접 콩물 냄새를 맡았다.
癸卯冬 聞豊基倅周愼齋始營書院于竹溪 士子坌集 君贄文往謁先生以客禮遇之
계묘동 문풍기쉬주신재시영서원우죽계 사자분집 군지문왕알선생이객례우지
계묘년 겨울에 풍기군수 신재 주세붕 선생이 죽계에 서원을 지어 선비들이 많이 모여든다는 소식을 듣자 군은 폐백문안을지어서 가서 뵈었으며 선생은 객으로써 예우하였다.
며칠간 머물다가 논제를 내었는데.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즐겁지 아니한가?”였다. 군은 즉시 제술하여 제출하니 선생은덕이 있는 그릇이라 칭하였으며 그 글의 말미에 비답을 붙여주기를 “우리 서원에 사람이 있으니 그 마음이 옥과 같도다. 하늘이 그대를 옥과 같이 여기니 그에 합당한 녹을 거듭 주시리라.”하였다. 인하여 말과 행동으로 규찰하고 실질이 있도록 서로 권면하여 동방(우리나라) 도학의 길이 쌓이고 쌓여 게을러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辭歸之日 贈一絶曰 爲學師原水 論交取兇觥 相䂓唯十字 庶悉百年情 其眷顧也如是
사귀지일 증일절왈 위학사원수 론교취흉굉 상규유십자 서실백년정 기권고야여시
마치고 돌아가는 날에 절구 한편을 써서 주기를 “학문은 근원을 스승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교분은 예의에 맞도록할 것이다. 서로 규찰할 것은 오직 이 열 글자이니, 모든것은 백년의 정이다.”라 하였다. 그 아끼고 신경써줌이 이와같았다.
其還謂余曰 豊川之有書院 乃是勝事 吾鄕獨無藏修之所乎 遂有營建之志
기환위여왈 풍천지유서원 내시승사 오향독무장수지소호 수유영건지지
돌아와서는 내게 이르기를 “풍천에는 서원이 있으니 아주 좋은 일입니다. 우리지역에는 책을 보관하고 선비들이 배움을 닦는 곳이 없습니다.”하고는 서원을 세우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丙午國恤[仁廟喪]時 人只擧義服之制而君獨以素粲終三年 人或有問卽曰 我有功緦之服云
병오국휼[인묘상]시 인지거의복지제 이군독이소찬종삼년 인혹유문즉왈 아유공시지복운
병오년에 (인종의)국휼을당하였는데 사람들은 다만 의리상 복제만 하였다. 그러나 군은 유독 3년간소찬을 지켰다. 그 이유를 묻는 이가 있으면 곧 말하기를 “내가 공복이나 시마복을 입어야 할 일이 있다.”고만 말하였다.
是年春遭其婦翁之喪 棺槨之備 親自營辦 葬具祭奠 盡其情禮
시년춘조기부옹지상 관곽지비 친자영판 장구제전 진기정례
이해 봄에 장인의 상을 당하였는데 관이나 곽을 갖추는 일을 직접 몸소 마련하였으며, 장례 도구나 제사 올리는 것에 모두 그 정성과 예의를 다하였다.
丁未夏 朴兄橫罹 無妄拘囚牢獄 君單童匹馬 奔告于甘棠之下 以直其寃
정미하 박형횡이 무망구수뢰옥 군단동필마 분고우감당지하 이직기원
정미년 여름에 박형이 재난을 당하여 억울하게 뇌옥에 갇혔는데 군은 어린 종하나 데리고 말한마리 타고 달려가 그억울한 사정을 말하고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戊申春 余避癘遠遊于公山 得病苦痛 至幾滅性 君追往求療 極盡調護 以續殘命
무신춘 여피려원유우공산 득병고통 지기멸성 군추왕구료 극진조호 이속잔명
무신년 봄에 내가 역질을 피하여 공산으로 멀리 가다가 병을 얻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군은 쫓아 와서는 구호하고치료하기를 극진히 간호해 주었으니 이 덕에 목숨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庚戌夏 朴兄見背葬送之祀[禮?} 營造之役以身當之
경술하 박형견배장송지사[례?} 영조지역 이신당지
경술년 여름에 박형이 어버이를 여의고 장례를 치러야 했을 때에는 영건하는 역을 몸소 담당하였다.
其四女一男 親自擇人婚嫁 躬辦婚需 使不失時
기사녀일남 친자택인혼가 궁판혼수 사부실시
그의 딸 넷과 아들 하나를 직접 사람을 택하여 시집보내고 장가들게 하였는데 몸소 혼수를 마련하여 때를 놓치지 않도록하였다.
신해년 봄에 탄식하며 말하기를, “세월은 빨리 지나가고 입신양명은 기약이없다. 어머니 나이가 많으신데 입에 달고 맛있는 것을 마련해 드리지 못한다. 옛 사람이 이르되.‘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노쇠한데 벼슬하여 녹을받지 않는 것은 불효 가운데 하나다.’라 하였다. 나는 장차부끄러움과 비웃음을 무릅쓰고 잔약한 읍의 훈도나 학관이라도 되어 집안에 쌀가마니나 지고 오는 정을 이루려 한다.”고하였다.
於是得除湖南長水學 時致月餼之餘 以資偏親之養
어시득제호남장수학 시치월희지여 이자편친지양
이에 호남 장수현의 학관으로 제수되었다. 이 때 달마다 받는 급료의여유가 있어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는 자산을 삼을 수 있었다.
癸丑 荒政方極 邑宰委以賑恤之任 君曰 此乃濟人之事 不可不盡心竭誠措置 民賴以存活者衆
계축 황정방극 읍재위이진휼지임 군왈 차내제인지사 부가부진심갈성조치 민뢰이존활자중
계축년에 기근이 심하여 진휼을 크게 해야 하는데 읍의 수령이 진휼하는 책임을 맡기려 하였다. 군은 이르기를 “이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이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다하여 조치해야만 한다.”고 하셨다. 백성들 중 이에 의지하여살아남게 된 이들이 많았다.
甲寅秋 聞周愼齋簀 奔往哭焉 自是心喪三年
갑인추 문주신재책 분왕곡언 자시심상삼년
갑인년 가을에 신재 주세붕 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곡하였으며 이 때부터 심상 3년을 지켰다.
丁巳 卜地于長川之上 創建書院 因時不利 纔立十間 而功未就緖
정사 복지우장천지상 창건서원 인시부리 재립십간 이공미취서
정사년에 장천 위쪽에 자리를 정하고 서원을 창건하였다. 그때 시세가불리하여 겨우 열칸 남짓만 세우고는 공사를 다 마치지 못하였다.
又以老兄嫁女之禮 勤苦資粧 余不費力焉
우이노형가녀지례 근고자장 여부비력언
또한 노형(필자)의 딸이시집가게 되었을 때 그 예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여 밑천을 준비해주어 나는 비용과 노력을 거의 들이지 않았다.
庚申 與南村姓族 結約爲契 講信睦族 又與柳義興希潛議立鄕約 講禮春秋
경신 여남촌성족 결약위계 강신목족 우여유의흥희잠의립향약 강례춘추
경신년에 남촌에 사는 동성 친족들과 계를 만들어 친족간의 신뢰와 화목을 다짐하였으며, 또한 의흥 유희잠과 논의하여 향약을 세워 봄가을의 예법을 강구하였다.
갑자년에 또 청도 학관으로 제수되었다. 전후로 학관에 제수된 것은 모두어머니를 모시기 위한 계책이었다. 일찍이 벽에 글귀를 써놓았는데 이르기를,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려 할 때에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쉬어야 하며,집안이 가난한데 어버이가 늙으셨다면 봉록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때부터 어머니께서 더욱 노쇠해지시자 오로지 전심을 다하여 따뜻하고 맑게 살피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며멀리 출타하지도 않았다.
무진년 가을에 개연히 탄식하며 이르기를 “우리 지역에 서원을 세우는 것은 내가 일찍부터 마음을 두었으나 이루지못하였다. 어찌 커다란 흠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동지들과읍재(수령)에게 고하여 그 일을 전담하여 맡아 새벽부터 밤까지힘을 다하였다. 경오년 가을에 그 미비한 채로 마무리하였는데 오직 사우만 지을 수 있었다. 일찍부터 그것을 한으로 여겨 을해년에 지역의 사대부들과 함께 사묘를 세웠으며 병자년 봄에 지방의 선정 모재김안국 선생을 봉안하였다. 방백(관찰사)이 계문하여 장천이라 사액받으니 군이 비로소 마음에 흡족히 여겼다. (이와같이) 학교를 세우는 일과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힘써 노력하여 사문을 지키는 것은 평소 공이 마음 둔바였다.
무릇 어머니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정성을 다하여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일찍이 신기한 꽃과 색다른 풀들을 심었고 좋은 계절 절기를 맞이하면 매양 어머니를 모시고 형을 맞이하여 연회를 열었는데 직접 팔관가를지어 헌수하고 잔 올리면서 사랑을 극진히 하였다. 날마다 지극히 정성을 바쳐 천륜의 즐거움을 펼쳤고이로 인하여 입으로 한 구절을 읊으니. “근심 속에 보내는 삶에서 원망하고 한탄하지 않았다. 우리 집안에 한가지 기쁜 일 있어 가장 자랑할 만하니. 칠순형제가무늬 옷 입고서 백세되신 어머니 앞에 있으니 몇 집이나 그럴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 벽에 18글자를 써서 이르기를 “옛 사람은 하루를 봉양할 수 있으면삼공의 자리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실로하늘에 감응하지 않았어도 일과 마음에 어긋남이 있으면 이르기를 “무릇 어버이를 봉양함은 그 뜻을 기르게 하는 것을 우선해야 하며 어버이의 마음을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그 드시는 것을 좋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반드시 두 종류를 갖추어 그 중 맛좋은 것을 택해서 올리면서 무엇을 드릴까요 여쭙고 드렸다.
凡親所着褻衣 常作小槽 必手澣然後付之人便旋之 器亦必躬自除濊 不使之人
범친소착설의 상작소조 필수한연후부지인편선지 기역필궁자제예 불사지인
무릇 어버이께서 입으셨던 때묻은 옷은 작은 물통을 만들어서 반드시 직접 세탁한 후에 인편에 맡겨 가져오게 하였다. 그릇들도 반드시 직접 씻어내었으며 남을 시키지 않았다.